나는 인혜와 함께 자취한 적이 있었고 방과 후에는 도서관에 쳐박혀 있거나,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늦게 귀가하곤 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났고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 죽음과도 같은 상황에서 나를 주체하지 못해 쩔쩔매던 어느 날, 귀가하는 내게 물건들을 집어 던지며 인혜가 말했다. 너, 왜 이렇게 사니? 비수처럼 섬뜻하게 늑골 밑으로 파고들던 그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채 헉 숨이 멎었던 느낌. 아마 그 순간 내 마음이 인혜에게서 떠났을 것이다. 말이 가진 위력보다 열 배는 더 심하게 내 쪽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 나도 남에게 부탁하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선생님도 그럼 거절도 못하시나요?" "그건 아니에요. 부탁하지 않는 것처럼 부탁도 거절하죠. 공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