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부산의 한 문화센터에서 주최하는 특강에 다녀왔다. 강의 주제는 건축과 페미니즘이었는데 대부분의 강연이 비슷한 주제여서 별다른 준비는 필요없었다. 슬라이드만 잘 챙겨가면 되었다.
강연이 끝난후 밤 열한 시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출발했다.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네시.
집으로 들어가 잠시라도 눈을 붙이면 못 일어날 것 같아 서울역 근처 사우나에서 잠시 쉰 후 바로 면당.자 사무실로 갔다.
이야기를 들은 후 면담자는 대뜸 물었다.
어제 부산 간다는 사실을 왜 어제 말하지 말하지 않았어요?
면담자가 그 대목을 지적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걸 왜 말해야 하죠? 제가 만일 오늘 여기에 오지 못한다면 말했을 거예요.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 못 온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그러나 오늘 여기 올건데 뭐 하러 말해요? 와서 이야기해도 되잖아요!
면담자는 고개를 돌려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왜 그토록 과민하게 반응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일로 연애하는 남자들 마음 많이 서운하게 했겠어요.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고지의 의무가 있지요. 부부들이 서로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지금 말하잖아요. 그럼 사후 고지인 셈 아닌가요?
사전 고지와 사후 고지가 있는데, 어떤 사안은 사전 고지를 해야 하는 거죠. 부산가는 것도 그렇지요. 불고지죄에요!
그런 걸 뭘 일일히 말해요? 그냥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는 거죠!
잘 났어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아예 저기 군부대 앞에다 크게 써 붙여 놓지 그래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상체를 더 깊숙히 의자에 묻으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맞은편 벽에 부딪치다가 면담실 공간으로 퍼져 나갔다. 허공의 웃음소리가 바닥에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려 면담자는 덧붙였다.
세상에는 혼자서 하는 일, 둘이서 하는 일, 타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 그런 것들이 다 다름니다.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이 너무나 어렵다는게 문제였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말을 하려면 벌써부터 혀가 굳고 얼굴이 달아 올랐다. 아주 친근하고 허물없는 관계라야만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왜 그런다고 생각해요?
전번에 이야기 했잖아요. 크라잉 코 헬프를 하지 않는 영혼. 처음에는 그걸 할 대상이 없었겠고, 다음에는 버릇이 되어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못했을 테죠. 더 커서는 자존심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어요.
도움받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어요. 제가 타인의 도움이나 호의, 친절 등을 별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이십대 후반 부터였어요.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겠구나…
말하면서 나는 속으로 아, 놀라고 있었다. 뜻밖의 이야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타인으로부터 동정받는 상황을 싫어하기는 했어도 도움을 받으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의식은 없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말을 하는데 벌써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뒤이어 가슴 그득히 물기가 차 오르는게 느껴졌다. 면담자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한동안 들먹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라캉이 말한 무의식의 언어화라는게 이런 상태를 말하는가 싶기도 했다. 면담자는 내게 충분한 시간을 준 다음 물었다. "무슨 생각 있어요?"
그 말을 하는데 왜 울먹해졌을까 생각했어요. 이 말 말예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겠구나 하는…"
그러나 나는 그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가슴 가득 물기가 차 오르며 말끝이 떨렸다. 입술을 물자 금새 울대 근처가 뻐근하게 아려왔다. 면담자는 의자 등받이에 목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뻑뻑해진 울대가 풀릴 만큼 시간이 지난 다음 나는 다시 말했다. "그 말이 왜 이리 슬프죠?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이젠 어떤 일이 있어도 …"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지…"
그러나 끝내 그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말끝이 떨리며 아예 물 속으로 잠수하고 말았다. 나는 또다시 눈물을 찍어내고 목청을 가다듬고 아무 일 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는 많이 놀라고 있었다. 그 말이, 그 정서가 그토록이나 나를 고단하게 만들었구나.
한 참 만에야 면담자는 상체를 일으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둑까지 차서 찰랑거리는데 저렇게 버티고 있었으니…"
그의 말이 서늘한 바람처럼 이마를 스쳤다. 아, 이렇게 나를 억압해왔구나, 괜찮다고, 나는 괜찮다고, 평생을 두고 나를 속여 왔구나. 정직하게 슬픔을 마주 보지도, 솔직하게 고통을 표현하지도 못했구나.
손끝, 발끝이 싸늘하게 식는 감각이 전해졌다. 내가 말이 없자 면담자가 다시 덧붙였다.
"몸 안의 슬픔이 자기를 알아달라고 몸을 아프게 하는 겁니다"
무의식이 꿈, 언어, 신체적 증상 등 세가지 형태로 나타 난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말이 나오는 걸 들으면서, 그 말이 하는 걸 그토록 힘들어 하는 자신을 보면서 바로 이것이구나 싶었다. 신체적 증상으로는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쉬었다.
목에 돌멩이가 걸린듯한 뻐근함,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통증, 명치가 뒤틀리는 아픔, 그것들이 모두 무의식이 표출되는 한 방법이었다.
무의식이라는게 그토록 가까운 곳에서 그토록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문장의 전문은 이것이었다. '내가 타인의 호의나 친절을 별 저항감 없이 받아 들이게 된 것은,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이 내 속에서 생긴 이후부터였다'<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 김형경>
<전세계 한국어 사랑 소나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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